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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마지를 기리며 JESUS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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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Margaret F. Pritchard 선교사 변마지

한국에오다

끝없는 사랑, 측량할 수 없는 은총
질 짐이 점점 무거워질 때보다 큰 은초을 베푸시는 이해야 할 일이 늘어날때도 더욱 힘을 솟하게 하시는 이 고난이 더한 곳에 몸소 자비를 더하시는 이 많은 시련을 주시나, 갖가지 화평도 주시는 이 우리가 견딜 힘이 없어 지폈을 때 아직 반나절인데도 힘겨울 때 우리의 비축 품이 바닥 났을 때 비로소 당신의 온전한 베품을 시작하시는 아버지여 끝없는 사랑, 측량할 수 없는 은총 그 크신 능력을 우리들은 알 수 없어라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한량없는 부유함으로 언제나 주시고 또 주시고 또 다시 주시는 이여.
크신 기대에 못미쳐 죄송해요 (1회 졸업생 최순자)

저는 열일곱 철부지로 열심히 공부만 하다가 6.25가 난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6월 28일 갑자기 교장선생님을 비롯하여 선교사 일동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어요. 물론 우리들이 사정을 몰라서 그랬지만요. 그때 달빛이 기숙사 창문에 비쳐서 십자가 형태로 나타난 것을 보고 기도하며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한편 사감 선생님이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셔서 저는 책 몇 권 싸 가지고 기숙사를 나서서 전남 광주까지 사흘이나 문전걸식하며 걸어갔습니다. 그 뒤 광주의 수피아 교장선생님의 추천으로 장학생이 되어 미국까지 가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변 교장 선생님은 특별히 자주 얼굴을 대하면 "좋소"하고 많은 관심을 보여 주셨기에 저는 열심히 공부와 실습을 할 수 있었습니다.

1952년인가에 기숙사에 다시 도착했을 땐 교실과 오락실 등에 근 100여명의 아이들이 천연두를 앓아 이리저리 바닥에서 치료받고 있었습니다. 적은 지식이지만 치료를 도우며 다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학생은 겨우 열 명이어서 둥글게 둘러앉아서 교장선생님의 환대 속에 공부했었습니다.

교장선생님의 모습이 기억 납니다. 아침 일찍 기숙사에 오시면 신문지 1/4쪽과 핀 3개씩 나눠주시던 모습, 실습 장에선 자를 가지고 구두 굽을 재보곤 "너무 좋아요" 하시던 모습, 병실이나 간호 실에 오셔서 손수 창문을 쓸어보시고 "먼지가 많아요. 다시 청소하시오"하시던 모습들... 부지런히 3층까지 다니시면서 철저히 교육시키셨지요. 우리한테 거시는 기대가 크셨던 것 같아요. 한번은 전국실습대회에 박 상주가 대표로 가서 일등을 했는데 그이를 볼 때마다 기쁨의 미소를 가득 지으시면서 기특한 학생이라고 칭찬하셨지요. 기숙사 생활이 개선되면서 아마 나일론 간호 복을 처음 입었지 싶어요. 흰색 구두와 양말까지 받았을 거예요.

졸업 후에 졸업장과 추천서를 갖고 광주 제중병원에 근무하게 되었지요. 그러다가 그만 경상도로 시집을 갔어요. 결혼과 함께 여성 마취 사로 미국에 갈 예정도, 소록도나 결핵 요양소에서 봉사하겠다는 결심도 모두 잊어 버렸어요. 하지만 가끔 씩 보내주신 간호학보가 얼마나 위로가 되던지... 이제 벌써 육십을 넘어서니 부질없고 하는 일도 없이 지내내요. 다만 변 교장 선생님의 가르침과 신앙을 간직한 채 부끄럼 없는 큰딸로 이웃에게 열심을 다하며 지냅니다.

호랑이 변마지 선생님 (2회 졸업생 공순구)

변 선생님은 우리들 생각과는 달리 '호랑이'란 별명을 좋아하셔서 호랑이 그림까지 벽에 붙여 놓으셨습니다. 차갑고 조금은 매서운 인상이지만 다정다감하셨습니다. 부지런히 걷던 모습과 입이 귀에 닿으리만큼 시원스레 활짝 웃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아무리 큰 문제와 걱정이 있어도 교장 선생님에게 가지고 가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 이류라고 까지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어떤 문제 앞에서도 한결같이 웃으실 수 있었음은 아마도 깊은 신앙에서 연유된 것이라 생각합니다.선생님을 처음 본 것은 간호학교 입학 면접 때였습니다. 외국인이라 내심 떨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색한 억양으로 "자기는 요강 비울 수 잇꼬?"라고 물으시기에 알아들을 수 없어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때 옆에 계시던 조 덕례 선생님께서 환자의 대소변기를 치울 수 있느냐는 말씀이라고 설명해 주셔서 겨우 대답한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은 항상 한국인의 입장에서 우리들이 쓰는 언어로 대화하시려 한 사려 깊은 분이기도 하십니다. 한번은 영양학 시간에 노트를 읽어 주셨는데 "낙화생과 자가영양에 지방이 좋으니..."라고 하셔서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어 킬킬 대고 웃으니까 선생님께서는 "음..."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실은 '낙화생과자가 영양에 좋고 지방이 많다'는 내용이었지요.

그후 선생님께서 정년 퇴임하시고 버지니아 리치몬드에 계시던 1975년, 제가 행정연수를 하러 미국에 갔었는데 음식 때문에 무척 고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변 교장 선생님께 전화를 드리고 집을 방문했는데 문을 여는 순간 깜짝 놀란 것은 그토록 그립던 한국음식, 김치와 김, 불고기, 잡채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향수병에 걸린 줄 아시고 자상함과 애정을 표현해주신 선생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매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어김없이 한 달 전부터 80여명의 전직원과 그에 따른 가족들에게까지 성탄선물을 전부 하되 연령과 특성에 맞게 뜨개질한 모자며 털장갑, 목도리, 스웨터 등을 창고에 두고 하나하나 나눠주시기도 했습니다. 선물 그 자체보다는 받기 전에 느꼈던 호기심과 가슴 설레임이 아직도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매 성탄절마다 선생님을 기억하게 합니다. 또 제가 간호부장이 되었을 때 '제자 1회 호랑이'라고 애칭을 붙여 주셨던 일, 편지 글머리에 '사랑하는 내 딸아'라고 쓰시고 마지막엔 꼭 'Mother 변'이라고 쓰시던 글들이 기억 납니다. 진실만이 진실로 통하듯 사랑만이 인간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교훈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 변 마지 교장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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