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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 JESUS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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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garet F. Pritchard 선교사 변마지

일생 동안 좋은 간호사요 엄격한 교육자로서 이 땅에 처음으로 정식교육받은 기독 간호사를 배출시킨 주인공 간호사의 소중한 책무와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는데 필요한 전문적 실력을 쌓을 수 있는 간호학교 설립에 애쓰신 분입니다.

변마지 일생 1 파일 다운로드
한국에 오다, 광주병원에서의 첫 출발, 어려운 한국말, 델마썸양, 간호부가 아닌 간호원을, 첫 휴가와 슬픈 이별들
변마지 일생 2 파일 다운로드
신사참배문제, 2차 세계대전과 하나님의 계획, 전쟁종료, 다시 한국으로, 제 2의 고향, 전주, 만년필과 백열전구, 개원과 간호학교설립, 한국전쟁과 피난, 병원의 재건, 전쟁 후의 상황, 성장하는 병원과 학교, 4.19혁명과 5.16쿠테타
변마지 일생 3 파일 다운로드
환갑잔치, 병원의 확장과 기숙사 건립, 은퇴 후 한국 방문들, 그 후의 간호학교상황, 항상 감사하며

1900~1940

  • 1900. 01. 01 버지니아주 윔스프링에서 태어나다.
  • 1901. 05. 07 남동생인 윌리엄 글렌이 태어나다.
  • 1903. 11. 02 어머니 돌아가시고, 어린 남매들은 웨스트버지나아 던모어에 계신 할머니 댁에서 아버지의 재혼 전까지 할머니와 고모 두분, 삼촌 세분과 함께 지내다.
  • 1912.선교사가 되겠다는 소명감을 갖다.
  • 1914.웨스트버지니아 던모어 초등학교를 졸업하다.
  • 1920∼25.공립학교 교사로 역임하다
  • 1926∼29버지니아주 리치몬드 장로교신학대학 기독교교육학과를 졸업하다.
  • 1929.졸업.간호사로 개인 간호경력을 쌓다.
  • 1930.뉴욕주 등록간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RN이 되다.
  • 1930. 08. 한국 광주(光州) 그레엄 기념병원 간호과장으로 부임하다.
  • 1933.광주병원 불이 나다.
  • 1935.첫 휴가중에 서모가 돌아가시다.
  • 1938.병환 중에도 이해심 많고 하나님께 헌신적인 선교사이자 동료인 브랜드박사가 사망하다.
  • 1940.오직 하나뿐인 혈육인 글렌이 뉴올리언즈에서 맹장수술 후 합병증으로 죽고 젊은 아내와 두 딸을 남기다.

1940~1970

  • 1940∼45.2차세계대전 직전에 광주에서 1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데 이들이 모두 간호사시험에 합격해 일본당국으로부터 자격증을 얻는다. 한편 일본당국은 신사(神祠)참배를 기독교 학교에도 강요하였으나 대부분의 교회가 이에 맞서 대항하고, 변마지의 학교도 이러한 명령을 받아들이느니 학교문을 닫기로 하여 광주병원과 간호학교를 폐교하다
  • 1947. 10. 2차세계대전 후 폴 크레인 박사와 함께 한국에서 다시 선교를 시작하다. 전쟁피해로 파괴된 병원시설 때문에 병원 물품, 여러 도구, 음식들을 구입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동료 선교사 28명과 합류하여 같은 배로 한국으로 돌아오다10월에 크레인 박사와 부산에 도착하여 기차로 전주까지 와서 예수병원을 재건하려 하는데, 선교회에서 전주를 택한 이유는 첫째 부족한 수련의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였고 둘째는 간호학교를 설립할 목적 때문이었다.
  • 1948.전주에 예수병원(The Presbuterian Medical Center) 개원하다.
  • 1950. 06. 01 미화 35,000불을 들여서 지은 간호학교 건물에 첫 신입생 20명이 입학하다. 부속건물 1층에는 식당과 주방, 2층에는 60명 규모의 기숙사와교실, 사무실을 꾸미다.
  • 1950. 06. 01 재단법인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 유지재단에서 전주 예수병원 부속 간호고등기술 학교를 설립, 초대 이사장에 짠뺀네스트 타마자, 초대 교장에 변마지 취임
  • 1950. 06. 25 주말 예배 후 크레인 박사가 북한이 38선을 넘어 서울로 내려 왔다고발표하고, 선교회에서는 부산으로 피난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다.
  • 1952. 01. 02 변마지를 기다리고 있던 첫 입학생들과 간호학교를 다시열다
  • 1952. 09. 01 다음 학기의 15명의 학생이 입학하다
  • 1952. 12 크레인 박사가 전주에 도착할 때까지 병원은 선교의사가 없는 채로 운영되었으며, 크레인 박사가 도착하여 처음 두 달 동안 100여회의 중요수술을 진행했다.
  • 1953. 06. 19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으로 25,000명의 전쟁 포로가 풀려나 고향과 친지들에게 돌아가다.
  • 1954.여름 데이비드 존 실 박사 부부가 도착하고 토미 데일러가 병원실무책임자가 되다.
  • 1954.변마지의 학생들은 대한간호협회로부터 금, 은메달을 받고, 간호학교는은제(銀製) 나이팅게일 트로피를 수상하다. 또한 미국 민간인 협력회는한국에서 가장 훌륭한 간호학교로 변마지의 학교를 선정하다
  • 1955.예수병원과 간호학교에서 변마지의 한국봉사 25주년을 기념하다
  • 1956.휴가 중 두달 동안 영국, 파리, 독일, 인터로켄, 융프라우, 로마, 아테네,그리스, 카이로 성지(聖地), 레바논, 파키스탄, 인도, 타지마할, 켈커타,방콕, 홍콩, 동경 등 여러곳을 여행하다.
  • 1959. 10.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예수병원을 방문하고, 정부에서 한국기독교 75주년 기념행사를 실시하다.
  • 1960.한국에서는 60회 생일을 축하하는 ‘환갑(Whangap)’이라는 풍습이있다. 간호학교 졸업생과 재학생- 변마지의 ‘딸들’이 환갑 축하행사를 계획하는데, 그녀의 생일인 정원초하루는 불편하기에 모든 졸업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가을로 미뤄서 환갑과 진갑을 함께 기념하기로하다 축하행사 제1부에서는 먼저 졸업생으로 구성된 성가대와 함께 매우 뜻깊은 예배를 드렸고, 이어서 선물을 드리는 순서가 있었다. 축하선물은 동, 은 제품에서 새장속의 새한쌍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예배 후에는 축하의 큰절을 하는 사람들로 학교가 붐볐고 변마지는 환갑 때 입는 전통예복을 입었는데, 나중에 이 옷을 노드켈로라이나 몬트리트 소재의 역사재단(Historical Foundation)에 기증했다.
  • 1960∼61.1960년 4월 19일은 학생의 날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정부가 그토록 부패했는지 몰랐다고 고백하고 국회의 요청에 따라 하야하여 나라를 떠난다.
  • 1965. 08. 그녀가 다녔던 교회의 뜻을 같이하는 의사들로 구성된 의료자선재단 (MBF)에서 대대적으로 헌금한 500만불을 여성생일헌금회(Women's Birthday Offering)로부터 받다. 이 헌금은 의료선교회의 건물과 장비를 마련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 1969.서독 복음전도중앙회(ECA)로부터 150만불을 받아서 새 병원 부지에 250개 침상규모의 간호학교와 기숙사와 졸업생들을 위한 건물의 초석을 만들다.크레인 박사가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세계선교회 회장으로 일하다 데이비드 실 박사가 새로운 병원장으로 부임하다.

1970~1990

  • 1970.세계선교이사회가 공식적으로 1970년 1월 1일자로 변마지의 은퇴를 결정하자, 변마지는 학교수업을 종결하고 성대한 환송회를 마친 뒤 3월에 버지니아주 리치몬드로 돌아가다. 한편 자네트 켈러 부인이 선교활동을 이었고 간호학교를 보필하며 문교부 지시에 따라 간호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 1971. 10. 10 퇴임 후 첫 여행으로 간호학교 졸업생들의 초청에 의해 새 병원건물 봉헌식 때 한국을 방문하여 쾌청한 하늘에 한국, 미국, 독일의 세 나라 국기가 휘날리는 것을 보다. 이 병원은 50만불을 들여 250개 침상규모로 새로 지은 것으로 한국에서 예수병원으로 알려졌다.
  • 1973. 06. 02 제3대 엄재정 교장 취임
  • 1973. 10. 세계선교이사회가 변마지에게 정신질환이 있는 한국소녀를 한국에 데려다 줄 수 있는지 여부를 묻는데, 반드시 의료인이 동행해야만 한다는 의사의 지시를 지켜야하는 긴급한 것이었다. 이에 변마지는 선교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한국의 재입국 허락을 받아 두번째로 한국을 방문하다.
  • 1975. 05. 대한민국 정부는 간호학교에 별개의 이사회를 구성하여 전문학교로서의 자격을 갖추도록 요청하다. 변마지는 켈러교장이 예전의 병원건물을 기숙사와 교실로 사용해 등록학생수를 증원할 수 밖에 없음을 알았다.(당시 학생수는 120명) 한편 서독 복음전도중앙회가 정책변경으로 더 이상 건축기금을 줄 수 없다고 알려와서 병원이 다 지어졌을때 학교를 새로 지을 기금은 없었다. 따라서 실 부인이 미국방문기간 동안 보조금을 모았다. 새로운 학교 건물이 봉헌되고 이때 변마지는 조카 진 엘리스와 세 번째방문을 하였다. 또한 새강당에서 아주 감동적인 헌신예배를 갖는데 이 예배의 첫 번째 영예는 이 학교의 설립자인 변마지였다 그리고 이사회는 학교이름을 '마가켓 프릿차드 간호전문대학'이라고 명명하였다.다음 2대 교장인 켈러부인과 첫 한인간호사이자 교감인 조덕례선생이 영예를 받았고, 건축기금에 도움이 컸던 데이비드 실부인에게 특별상이 수여되었다. 새로운 학장으로 엄재정이 임명되었고 홍신영이 601번째 졸업생이 되었다. 당시 2회 졸업생인 공순구가 예수병원의 첫 한인 간호부장으로 26년동안 봉직하고 있고, 7회 졸업생인 라명희가 한양대 메디컬센터에 간호과장으로 임직하고 있다.
  • 1975. 12. 19 변마지는 위스트민스터 켄터베리 노인복지원으로 이사하다. 이 복지원은 버지니아 리치몬드에 있는 성공회와 장로교회가 운영하고 있는것으로 미국내에서도 시설이 제일 좋다는 곳 중의 하나이다. 한 사람의 남은 여생을 위해 모든 것을 돌봐주어 참으로 평안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그녀는 계속 활동하려 했으며 리치몬드 한인교회의 장로로 피택되어 봉사했고, 리치몬드에 가깝게 사는 강정자 가족과 즐겁게 지냈으며 언제나 아직도 예배드릴 수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했다.
  • 1984.변마지는 마지막 한국방문으로 한국장로교회의 한국기독교 백주년 기념
  • 1984. 09.15-28 행사에 참석하였다. 일요일 아침 열시 삼십분에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인 영락교회에서 그의 친구 마미 그랜트와 예배에 참석한다. 저녁에는 한국기독교백주년 기념만찬이 있었고 21개국의 대표들이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참여했다. 목요일에는 본 행사가 올림픽경기장에서 열렸는데 18,000명이었다. 축하설교는 기념행사위원회 회장이자 영락교회 설립자이며, 명예 당회장인 한경직 목사가 맡았다. 그녀는 여러 퇴직 또는 현역 선교자들과 함께 수상자가 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대회였다. 그녀는 자신이 대견스러웠으며 하나님의 능력에 영광을 돌리고 감사의 기도를 하였다. 영적이고 영화로운 예배가 계속되었다.한편 전주의 간호학교에서는 홍신영 학장과 교수들, 교직원들이 환희에 찬축하행사를 열었으며 변마지는 이제 학생수가 272명으로 늘어난 이 학교를 방문하였다. 예전의 선교사들과 한국 선교사들이 다시 만나는 기쁨의 시간이었고 충실하고 사랑스러운 간호학교 딸들과 정든 곳을 방문한것이다.
  • 1987. 06 28 필라델피아 지역 동문 모임에 참석하여 간호전문대학 차기 학장 후보로 양광자 박사를 지명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날마다 하나님께서 적합한 인재를 주시기를 기도했는데,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양박사가 아주 잘 감당하리라고 생각합니다."
  • 1988. 01. 01 변마지의 마지막 생일을 리치몬드 한인장로교회 서준덕 목사가 1987년 가을 무렵부터 생긴 척추질환치료를 위해 입원시킨 리치몬드 기념병원에서 맞이하다. 몇몇의 한국 딸들인 양광자, 이원자, 강정자, 문옥자들이 병원을 방문하여 침상가에서 생일 케이크를 자르며 생일을 축하한 뒤 정신이 혼미해지며 "이제 끝났다. 끝이야, 끝"이라고 되뇌였다.
  • 1988. 02. 14 변마지는 병원 침상에서조차 그리스도 정신에 기초를 둔 고결한 성품을 유지하여 결코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과 영화롭게 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그녀의 조카딸 진(Jean)이 회상하건대, 어느날 아침에 변마지는 아름다운 귀향을 준비하신 하늘 아버지의 영원한 은총에 관한 꿈에 흥분되어 한시간 가량을 찬송했다고 한다. 그날 밤 침대가에 한 사람씩 다가서게 하고 승리하는 영혼의 영감을 같이 나누었다. 서준덕 목사가 찾아와 그녀의 손을 잡을 때 두 눈은 빛나며 밝아졌고 평강과 담대함과 위로를 주시길 기도했다. 또한 그녀는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하나님만이 알아들으실 수 있는 매우 아름답고 감동적인 기도를 하고 몇시간 뒤 고요하고 평안하게 잠들었다. 1988년 2월 14일 새벽 2시 15분, 발렌타인데이였다
변마지 , 마가렛 브란시스 프릿차드는 하나님께 충성하고 복종하는 종이었다.
삶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그의 사도들을 위해 하신것처럼
그녀는 우리들에게도 신약성서 요한복음 17장을 남기고 우리들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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